출산을 하고 1년이 지나고 아기가 어린이집에 가고 여유가 생기니 자연스레 저의 행색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어요. 뿌리 염색할 시간이 지나도 한참 지나 검은색 머리가 한 뼘이나 자라고, 눈에 띄는 곳에 나기 시작한 흰머리들... 지금 신고 있는 신발도 맘에 들지 않았고요. 저에게 아무 감정이 들지 않는 않는 옷들과 아이템들을 그냥 필요에 의해 생각 없이 걸치고 다녔었어요. 사실 아이 셋을 키우고 저의 일을 하면서 예전보다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지 않았고, 또 그래야 할 이유도 느끼지 않았던 제가 며칠 전 아웃렛에 가서 부츠 두 켤레, 짧은 가죽 재킷 한 벌, 검은색 롱 울 코트 한 벌, 원피스 한 벌, 투피스 한 벌, 청바지 한 벌, 검은 상의 한 벌, 흰 남방 한 벌, 스웨터 한 벌, 스트랩 가방 1개를 한꺼번에 샀어요 💸🤪. 그것도 신발 하나를 제외한 모든 아이템들을 한 브랜드에서 다 샀다는 사실! (이탈리안 독립 패션 브랜드 ixos. 인스타그램에 올렸어요!) 혹시나 제가 한번 사면 엄청 사는 그런 사람인지 아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저는 무언가를 사는 데 있어서 상당히 조심스러운 스타일이에요 (식탁도 거의 10개월째 고민만 하고 있어요). 후회하는 것을 싫어해서 충동구매는 하는 편이 아니고요. 그럼에도 이번에는 뭐에 홀린 사람 마냥 점원이 가져다주는 아이템들을 족족 다 골랐지 뭐예요.

집에 와서 쇼핑한 걸 다 꺼내보는데 처음엔 '내가 미쳤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화려한 조명과 날씬해 보이는 피팅룸 거울이 없어지니 현실로 복귀한 느낌? 팔엔 솔이가 안겨있고요. 사실 이건 당장 필요한 건 아니었고, 저것도 아니었고... 사실 패션이라는 것이 '합리성'을 따진다면 당장 필요한 건 없어요. 청바지 없는 사람 없고, 상의 없는 사람 없잖아요? 이 돈을 딴 데 쓸걸. 식탁 사는데 쓸걸. 아이들 옷 사는 데 살걸. 크리스마스 데코 하는데 쓸걸. 별의별 대안이 다 떠오르고 우리 집 돈을 흥청망청 쓴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기도 했더랍니다.

그런데 3일 정도 지나니 '나 이 정도는 사야 됐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겠지만, 패션이라는 것이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합리성' '시의적절성' 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자기만족이 큰 영향을 끼치니까요. 최근까지만 해도 제 옷을 위해 사러 가는 시간은 저에게 상당히 아까운 시간이었어요. 구경조차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어요. 그래도 정말 필요해서 사러 가면 한두 개만 사니 옷 스타일 엔 큰 변화가 만들어지기 힘들더라고요. 사실 스타일 변화를 주려면 기본 아이템부터 변해야 하거든요. 저는 기존의 엘레강스+실용주의 스타일에서 조금 더 엣지 있는 시크한 스타일로 변화하고 싶었던 터라 기본 아이템들이 모두 변해야 했어요. 물론 시간을 들여서 한두 개 아이템씩 천천히 바꿔가는 것도 좋지만 저는 드라마틱한 변화를 원했던 것 같아요.

이번에 그렇게 왕창 사고 나서 옷장 정리를 싹 했어요. 저희 집에 제 옷장이 딱 한 칸인데 거기에 있던 예전 옷들을 거의 다 빼고 이번에 산 옷들로 채웠어요. 새거 1개가 들어가면 안 쓰는 거 2개가 나가야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이번에 산 옷들보다 훨씬 많은 양의 옷이 나왔고 옷장은 이전보다 더 여유 있어졌어요. 그런데 정말 괜찮은 아이템이 가득한, 무기(?)가 가득한 창고 같달까요? 👩‍🎤

이번의 제 새로운 패션은 저 대신에 제 무드를, 생각을 이야기해주는 것 같아요.

• 난 다정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하하호호 하는 사람은 아니다.
• 나는 이탈리아어를 못하지만 나만의 명확한 의견이 있다.
• 나는 세 아이의 엄마이지만 아이들 만큼이나 나 자신도 중요하다.
•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내 돌파구를 찾는 편이다.
• 나는 내 온 마음을 다해 살고 싶고, 내가 입고 있는 옷들도 나의 이런 성향을 표현하길 바란다.

등등 이런 메시지를 담고 싶었던 것 같고 그러한 저의 의지가 정말로 이 옷들을 입음을 통해 저에게 힘을 주는 것 같았어요. 내가 좀 강해 보이고 싶을 때, 보기에 강해 보이는 옷을 입는 것도 하나의 방법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 경험으로 패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고, 내가 말을 안 해도 나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이 패션이라고 생각을 하니 아침에 옷을 입을 때도 좀 느낌이 달라요. 글로써 나를 표현하는 것만큼이나 내가 입는 것도 나를 표현하는 것이라니 표현욕구가 큰 저에겐 또 다른 삶의 활력을 주네요. 

오늘도 레이스업 검은 부츠를 신고 언밸런스 아방가르드한 치마를 입고 나섰습니다.

정답은 없다. 그러니 오늘도 나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