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간은 나를 잊는 시간이다. 몰입을 만난다.
음악이 나오기 전 기본 자세를 준비한다. 이를 테면, 키가 커지는 느낌으로 온몸을 위로 길게 늘이고, 어깨와 등을 내리고, 가슴을 살짝 내미는 대신 흉곽은 닫고, 아랫배에 힘을 주고, 엉덩이 밑 근육에 힘이 들어가게 골반을 세우고, 다리 안쪽 라인을 붙이도록 안으로 조이며 길게 늘이고, 뒤꿈치를 앞으로 내밀어 턴아웃(turn-out)이 되도록 한다. 그리고 음악이 나오면 드디어 시작이다. 온 몸으로 아름다운 선을 만드는 내 몸을 상상한다. 원 앤 투 앤 동작 순서를 생각하며 박자를 맞춘다. 그리고 섬세한 근육의 쓰임을 느끼려 애쓰며 집중한다.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잠시 잡념이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박자를 잃고 자세가 흐트러지고 아름다운 몸짓 따윈 언감생심이다. 아무 생각없이 오직 내 몸과 음악에만 집중하는 그 순간의 경험들을 난 사랑한다.
발레의 첫 시작은 꽤나 시시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몸 맵시가 뭔가 달라 보였다. 다이어트를 한 것은 아니고 단지 발레를 시작했을 뿐이란다. 그렇다면 나도 변할 수 있으려나. 둘째 딸이 2년 넘게 발레를 하고 있어도 내게는 와닿지 않던 발레가 순간 내게 성큼 다가왔다. 나도 할 수 있을지 몰라. 나도 달라지고 싶어.
발레 수업 첫날. 발레복을 입은 용감한(수영복 같은 레오타드에 핑크빛 타이즈라니) 수강생들 사이에서 추리닝을 입고 어색하게 서있는 내 모습이 거울에 비추니 이대로 그냥 집에 갈까 싶었다. 이내 음악이 나오자 나만 쳐다보고 있는 거 같던 다른 수강생들은 제각기 동작에 맞춰 음악을 타느라 분주하다. 음악 소리에 내 민망함이 옅어진다. 내 상상의 버튼이 켜졌던 것일까. 어려서부터 음악을 들으며 혼자 사색에 빠지곤 했다. 깊은 감정에 빠져 정점을 찍고서야 현실로 돌아오곤 했다. 음악 속에서 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다른 사람이 되곤 했다. 어설프든 능숙하든 발레음악에 맟춰 움직이는 몸짓들이 음악만큼이나 우아하다. 이런 세상이 있었구나. 내 몸짓에 발레리나의 몸짓이 겹쳐지는 듯하다. 난 그렇게 발레에 반해버렸다. 잘 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
아. 오늘은 가지 말까. 내가 발레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싶은 날들도 있다. 그런 날일수록 도망치듯 발레 수업에 간다. 1시간 30분동안 음악에 맞춰 내 근육이 쓰이는 느낌에만 집중한다. 정신없이 동작을 쫓아간다. 더 정확하게. 더 아름답게. 땀방울이 바닥에 떨어진다. 숨이 턱 끝까지 찬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오면 발레 수업을 하러 가기 전 내 고민들이 별 것 아닌 것들이 되어있곤 한다. 마치 여행을 가서 내 현실 세계와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가졌던 것 마냥. 여행에서 돌아와 고민들을 다시 들춰볼 여력이 생기고 나아가 어느새 사소해져버린 것처럼. 그렇게 무거운 마음을 털어내고 난 몸도 마음도 가뿐해진다. 습관 같은 내 우울을 털어낸다.
무대에 오르고 싶은 바램도 들지 않는다. 난 그저 내가 발레를 하는 그 시간이 좋다. 1시간 30분이 짧게 느껴지는 그 시간이 좋다. 뭔가를 잘 하고 싶은 마음을 불태울 수 있는 그 시간이 좋다. 잡다한 생각들도, 나 조차도 잊어버리는 그 시간이 좋다. 나를 잊어가며 나를 찾아가는 그 시간이 좋다.
아직도 설레일 수 있다. 우리는 지금도 꿈꿀 수 있다. 수줍게 숨겨진 나를 더듬어 알아채 줄 관심과 용기만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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