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작년이네요. 2022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 (Astrid Lindgren Memorial Award)은 스웨덴 작가, 에바 린드스트룀(Eva Lindström)이 수상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녀의 책은 2021년에 단추 출판사를 통해 <모두 가 버리고> 작품이 번역이 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는데요. 사실, 북유럽의 그림책들은 원서로 구하기가 매우 힘들거든요. 구한다해도 또 한국으로 배송되는 금액이 굉장히 비싸서, 국내 번역판이 나오기전에 좋은 그림책을 발굴하는것이 취미인 저도, 북유럽 그림책을 구하는건 좀 힘든 일이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목을 지닌 눈으로, '에바 린드스트룀'의 책을 번역하여 출판해주는 출판사들 덕분에 저도 에바 린드스트룀을 제작년에야 알게 되었어요.
그녀의 책들은 정말 담백합니다. 문장이나, 그림 모두 어느 하나 과장된 것이 없어요. 오늘 소개할 <걷는 사이>도 (출판사: 위고) 한 페이지마다 실린 글의 호흡이 길지 않고요. 원래 스웨덴판의 제목은 <Musse> 입니다. 무세는 이 책속에 나오는 나이든 개의 이름이예요. 아이는 무세를 무척 좋아합니다. 매일매일 무세랑 산책을 합니다. 아주 느리게 둘이서 동네 산책을 해요. 무세는 나이가 많은 늙은 개라, 빨리 걸을 수도 없고, 또 여기저기 냄새도 맡아야 하기 때문인데요,
아이는 무세의 걸음에 자신의 보폭을 맞춥니다. 무세와 눈이 마주치면, 다정하게 말을 건네기도 하고요.
무세는 나이가 많고 뚱뚱해요. 귀는 팬케이크처럼 얇고요. 걸을 때는 꼬리를 흔들어요. [.......] 무세가 하품을 하면 이빨이 다 보여요. 무세는 아주아주 착한 개라서 물지 않아요. [.......] 무세의 귀가 깃발처럼 펄럭거려요. 바람이 잠잠해졌어요. 무세의 귀가 다시 가지런히 내려 앉아요.
그런데 무세는 알고보니 자신의 개가 아닌, 옆집의 개였어요. 산책을 모두 마치고 돌아와 주인아주머니에게 목줄을 건네주며, 무세가 집안으로 완전히 들어가 보이지 않을때까지 아이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무세가 내 개라면 정말 좋을거에요, 라고 말하면서 자신도 집으로 돌아가요. 집으로 들어온 무세는 창문을 통해, 아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에서 책은 끝이 납니다.
저는 특히 아이가 바라본 시선이 참 좋아요.
재촉하지 않고, 눈치 주지 않고, 슬며시 보폭을 맞추어 함께 걷다가 무세의 표정과 이빨의 갯수, 그리고 팬케이크같이 얇은 귀가 펄럭이다 다시 잠잠해지는 모습을 이야기하잖아요.
저는 그 문장을 읽을때마다
사랑은 이런거구나.
그저 함께 걷는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것.
그의 귀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마음에 담아두는 것.
이토록 구체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첫째 아이는 10살인데요, 행동이 재빠르거나 민첩하진 못해요. 그래서 늘 학기초 상담을 하면, 종종 제시간에 과제물을 끝내지 못해, 혼자서 묵묵히 쉬는시간까지 시간을 들여 완성한다고 해요. 막상 아이는 쉬는시간에 쉬지 못하고, 하던것을 마저 하는것에 별 생각이 없는데 (^^; 하.. 아들아....) 그것을 지켜보는 선생님들은 좀 걱정이 되시나봐요. 저 아이가 계속 저러다 고학년되서도 저러면 어쩌지(?) 혹은 쉬는 시간에 쉬고 싶고, 뛰놀고 싶을텐데 마음이 좋지 않겠다 하고 좋은 마음으로 염려해주시는거죠. 그런데 저는 그런 말을 전해들어도 별로 걱정을 안해요.
바로 이런 그림책 덕분에요.
<걷는 사이>의 어린아이와 나이든 개는 서로 닮은 구석이 많아요. 대단한 놀이를 소리내며 하기보다는 바깥에 나가서 차분히 걷고, 바람을 쐬는것을 좋아하죠.
걸을때는 또 자주 한 눈을 팔고요.그래서 걷는 속도가 느리지만, 조금씩, 조금씩 한발짝 옮기고 쉬어가고, 때로는 세찬 바람이 가로 막아도 씩씩하게 나아갑니다. 두 존재의 시선으로 동네 한 바퀴를 걷고 나면, 내 마음에도 바람이 부는듯 해요. 다른 사람들이 둘을 앞질러가도 개의치 않아요.
그래서 저는 우리 첫째 아이가 온갖것을 살펴보느라 행동이 조금은 느리지만, 학교 가는 길에 수수꽃다리 꽃이 피었다고 말해줘서 좋고, 오늘 수요시장에는 분식집이 없더라며, 분식집 사장님이 무슨일이 있으신거 아니냐고 골똘하게 걱정하는 표정이 사랑스러워요.
아, 오늘은 아침에 비가 좀 왔네요. 녀석이 하교 하는 시간, 물웅덩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해서 아마 집에 평소보다 10분은 늦게 들어올것 같아요. 물웅덩이 주변을 서성이며, 한 발 넣어보고, 돌아다니는 지렁이들 밟힐까봐 풀숲에 넣어줘야 되고, 분명 바쁠 예정(!) 입니다. 꼭 빠르게 휘몰아치는것만이 정답이 아니듯 찬찬히 들여다본다는 것은 생각을 자극하고, 잠겨진 언어를 풀어내면서 상상력이 돌아다니게 하는 힘일테니까요.
에바 린트스트룀의 다정한 글과 그림이 저의 조바심을 자꾸 붙잡네요. 느릿하게 보폭을 맞춰보라고.
그러면 너에게도 오늘 핀 수수꽃다리가 보일거라고.
사랑은 이렇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거니까요.
p.s 에바 린드스트룀, 그녀의 그림책 세계가 좀 더 궁금하시다면 이 영상을 시청해보세요.
by Bramasole |